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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요리 & food

가을밤, 남자에게 잘 어울리는 와인과 안주 (산 펠리체 일 그리지오)

가을이라는 시간이 정말 소중해졌죠?
남자의 계절이라는 이 가을... 눈깜짝할사이에 휙 지나가버리는 것이 벌써 Barry Manilow 의 'When October Goes' 를 들어야할 때가 왔다는 것이 믿기 힘들정도네요. 그 선율이 생각날 즈음이면 숫자에 불과한 나이테에 또 한줄의 자국을 새기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리 유쾌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수북히 쌓인 붉은 단풍 낙엽을 보고 있으니, 받아들이기 싫은 또한번의 겨울이 이번에도 허락을 받았나봅니다. 점점 더 겨울이 싫어져가는 한해한해, 겨울이 비단 물리적으로만 길어진 것이 아닐겁니다.

암튼 그 단풍의 붉음 때문이었을까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까맣게 잊은채 갑자기 와인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은 거의 못하지만 가끔 하는 와인은 이럴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기어이 오늘은 집에서라도 한잔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백화점 와인 코너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집어온 녀석...




독특한 라벨을 보는 순간 전에 와인 잘 아시는 분이 추천했던 것도 생각이 나서 골랐네요

산 펠리체 일 그리지오 (San Felice IL GRIGIO)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인인데요 실제로 맛보는 건 처음인 와인이지만 상당히 유명한 와인으로 매장에서도 많은 분들이 찾으신다며 추천하시더군요. 더군다나 저 중세 기사와 같은 라벨의 회화작품이 '난 남자를 위한 와인이야'라는 얘기를 전하고 있는 듯한 모습도 맘에 들었구요 ^^ 와서 이 와인을 좀 검색해봤더니 꽤 평가를 받는 와인이었습니다. 품종은 산지오베제만을 100% 사용해 양조한 와인으로, 단일브랜드로서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군요

그럼 오늘밤의 고독은 이녀석을 메인으로 달래주고... 이녀석과 어울리는 음식은 뭘로 할까 고민이 되었죠. 만들기도 쉽고 편한 까나페 같은 핑거푸드류로 할까... 그저 치즈만 좀 사고 말까 했지만 왠지 오늘같은 날 그건 좀 안어울릴것 같고... 그렇다고 스테이크를 만들기는 좀 거하고...

그러다 눈에 띈 삼겹살 코너... 방앗간을 그냥 못지나치는 참새마냥 제 눈은 또다시 삼겹살로 가게 됩니다. 사실 평소에도 지론이... 삼겹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주류는 소주가 아니라 바로 와인이라며 맛있는 삼겹살을 먹는 자리에 가능하기만 하다면 와인과 함께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인데요. 결국 그 유혹을 못뿌리치고 한국형 와인 안주로 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선택된 오늘 와인안주의 주인공 들입니다.

대신 삼겹살을 평소처럼 쌈으로 먹게 되는 모습은 오늘처럼 쓸쓸함을 와인과 함께 넘겨버리고 싶을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씬이죠. 입을 커다랗게 벌려서 상추쌈을 구겨 넣는 모습은 아무래도 아닙니다. 쌈과 와인이 만들어내는 맛의 조화만큼은 일품이지만요 ^^

그래서 재료는 저렇게 준비해봤는데요.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1. 삼겹살은 최대한 기름을 빼면서 쫀득함이 없어지도록 거의 well-done 으로 구워냅니다. 좀 딱딱함이 느껴질정도로 바싹 구워야 쌈이 아닌 안주로는 적합한 식감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직화오븐으로 구워내면서 평소 쌈으로 먹을때보다 좀더 굽는 시간을 가져갑니다

2. 그리고 마늘과 양파도 같이 오븐에 굽는데요 대신 이녀석들은 긴 시간 삼겹살과 함께 굽다보면 오히려 물컹해지기 때문에 막판에 약간만 굽습니다. 그래야 기름이 쫙 빠지면서 바싹 구워진 삼겹살과 함께 물컹하지 않은 촉감을 입안에서 만들어내죠

3. 청양고추는 취향에 따라 살짝만 넣습니다. 원래는 와인안주가 그리 매우면 안되는데요, 이한국형 안주에 빼기 좀 섭섭한 재료이다보니 함께 넣어봤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샌드위치처럼 끼워주기만 하면 되요 ^^

삼겹살을 오븐에 구울때 적당한 소금을 좀 뿌리면서 구워야 쌈장을 특별히 넣지 않아도 안주로서 충분한 맛을 내줍니다.

다분히 한국적이면서 뚝닥 쉽게 만들수 있는 와인안주이지만 오늘의 선택은 이녀석입니다.




2006 빈티지를 가진 이 산 펠리체 일 그리지오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준비한 안주거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맛을 지녔습니다. 미디엄 바디이고 탄닌이 그렇게 많이 안느껴지면서 적당히 드라이한 맛... 조금 스파이시하면서 기름기가 느껴지는 안주의 맛을 적절하면서도 깨끗하게 눌러주는 느낌이네요

구입할 때, 판매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일 그리지오’라는 말이 흰머리라는 뜻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의미처럼 이 와인도 충분한 숙성을 거쳐서 풍부한 맛을 내는 듯 하네요. 그래서 더욱 가을에 어울리는 와인인 것 같습니다.

토스카나 와인답게 꽃과 과일향은 아주 좋습니다.
 



와이프는 전날 달린 나머지 -_-; 와인을 사양해서 결국 저만을 위한 만찬(?)이 되었네요. 남은 삼겹살과 부재료는 모두 와이프와 아이들 입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차려진 와인과 안주는 오로지 제 개인 메뉴가 되었습니다

남자의 와인다운건 좋은데 안그래도 고독을 달래려고 준비한 와인을 또 혼자 먹어야 하는군요 ㅎㅎ




혼자 있었다면 배리 매닐로우와 함께 해야 진정한 대박을 외칠 가을밤인데 말이죠... 그것도 CDP 가 아닌 턴테이블에 올려놔야 제격인... 하지만 현실은, 이 조화로움과 함께 귀에 들려오는 건 정신없는 아이 녀석들의 소리지름 뿐입니다 ㅠ.ㅠ

혼자 있을 기회가 있으신 남자분들은 꼭 제 대신 제대로 즐겨주시길... ^^
 



급조해서 만든 한국형 안주이지만 정말 맛있습니다. 어설프게 물건너온 까나페 같은 핑거푸드보다 개인적으로 와인에 훨씬 잘 어울린다고 자신있게 얘기하고 싶네요 ^^

상추쌈으로 먹었다면 비주얼은 좀 험했겠지만 이렇게 미니 꼬치 형태로 해놓으니 보기에도 괜찮죠?




쌈장이 생각나신다면 이렇게 살짝 올려주셔도 비주얼을 별로 해치지는 않습니다 ^^

대신 너무 맛이 강해지면 와인 맛과의 조화가 살짝 틀어지니까 주의하시구요





어찌되었든 10월의 끝자락을 달래려던 저만의 와인 디너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이라 이탈리안 푸드와 함께 했다면 또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삼겹살에는 와인이 최고라는 제 지론을 다시한번 확인한 저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인이 추천했던 이 산 펠리체 일 그리지오, 저도 추천드릴 수 있겠습니다. 떫은 맛이나 그렇다고 너무 달콤한 맛도 별로인 분들에게 풍성한 과일향과 함께 훌륭한 정제감을 주는 와인으로 다양한 음식에 어울리는 색깔을 가졌다고 보여지네요




위에 붙은 수상경력이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영국 와인 전문지 디켄터(Decanter)에서 5 Star Wine 으로 선정되었던 녀석이군요. 

가격대 성능비도 괜찮고, 가을 남자의 와인으로 제법 훌륭한 녀석. 


p.s. 유부남이라고 집에서 이런 분위기는 곤란하다고 하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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